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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는 땅, 고인 기억
 
2021년 9월 16일 – 2021년 10월 10일
13시 – 19시
사가
 
작가: 김제원
기획: 전솔비
협력: 사가
디자인: 이응셋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이곳을 ‘니-와’라고 부르던 목소리들이 사라지자 얼마 뒤 연못의 물이 마르기 시작했다. 돌을 쌓아 올린 웅덩이 아래에 이끼 대신 긴 풀이 자라나고 잉어가 헤엄치던 자리에는 풀벌레들이 숨어들었다. 움푹 파인 땅에 흙이 가득 쌓일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이곳을 ‘정-원’이라고 부르며 찾아온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그사이 숲처럼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을 적당히 솎아내고 빈자리에 파와 고추와 호박을 심었다. 예전엔 서울 곳곳으로 이동할 소금이 가득 차 짠 내음이 풍기던 창고에 옷과 이불이 쌓여 그 체취가 풀 내음과 함께 정원에 섞여 들어갔다. 나무를 다듬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가위로 천을 자르고 실을 엮고 미싱기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원을 가꾸고 동네 사람들의 옷을 수선하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돌보고 우물물을 길어서 다육식물들을 키워 시장에 내다 팔며 부지런히 자신과 집의 시간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흰 장미와 벚꽃이 자라던 자리에 붉은 장미가 피고 민들레와 강아지풀이 조금씩 비집고 들어와 사는 모습을 땅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끔 이곳을 부르는 말들이 ‘마-당’으로 바뀌기도 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나누던 대화들이 두 나라의 언어로 오고 갔다는 사실과 수십 년 전에 폈던 장미와 지금 핀 장미의 꽃잎 모양이 조금 다르다는 사실은 이제 희미해져 갔다.
 
사람들은 이곳을 피해와 가해의 역사가 얽힌 기억의 잔여물이라고 부르며 찾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이 집의 겉모습에서 얼마나 희귀하고 독특한 요소들이 남아있는지만 보고 떠났다. 폐허로 남거나 기념비로 남은 건축물들은 그것이 지닌 조형적 아름다움을 강조하거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들 이외로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은 알고 있었다. 사료로서 특정 건축물들이 역사에 기입될 때 그곳이 특정 국적으로만 한정할 수 없는 누군가의 내밀한 기억을 품은 집이라는 사실과 그 ‘누군가’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은 쉽게 잊히거나 주변화되곤 했다. 그렇기에 문화주택과 적산가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축물로 기록된 이 집은 뒤편에서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집의 뒤편에 자리한 정원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역사의 각주를 만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연못의 흔적으로 추측되는 자국 위에 피었다가 진 장미 넝쿨과 호박 넝쿨의 뒤섞인 줄기가, 아직도 마르지 않고 고여있는 우물물을 길어 올려 키워낸 다육식물들이, 거의 매일 찾아오는 고양이와 나비, 참새, 풀벌레들이 기억하는 풍경이 침략하고 삭제하고 빼앗고 빼앗긴다고 생각되는 역사 너머에서 서로 자리를 내어주며 살아가고 있었다.
 
김제원은 기록된 적이 없기에 부재한다고 여겨지는 집 뒤편의 역사를 감각하고 그곳의 풍경을 기록한다. 어릴 적 집 근처 바닷가에서 썰물 이후 작가가 목격한 땅의 풍경은 서울 후암동과 군산 신흥동의 두 집에서 찾아낸 정원 공간의 지형으로, 지표면과 종이와 기억이 기록되고 흔적화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김제원이 물에 녹는 종이에 그려나간 이미지들은 정원의 시점에서 바라본 집의 외피와 정원 곳곳의 시간들을 담고 있다. 그것들은 종이를 녹이는 물 위에서 수차례 흘러내리고 햇빛과 바람을 거치며 서서히 건조되고 마른다. 비가 오고 해가 날 때마다 마르고 젖기를 반복하며 종이는 땅을 이미지화하는 것이 아니라 땅 그 자체의 형태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땅이 종이가 되는 사이에 비가 많이 내려 정원에 풀이 무성해졌던 시간을 의식하듯 작가는 굴곡지고 두께가 부분적으로 불균등해진 종이 위로 풀처럼 이끼처럼 보이는 형상을 수놓아 풀의 기억을 한 번 더 덧씌운다. 이제 실과 종이는 함께 녹았다가 굳어서 하나의 덩어리로 엉키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기억의 지도를 완성한다. 두 나라의 실, 두 나라의 나무, 두 나라의 기억. «녹는 땅, 고인 기억»은 두 장소, 두 이름, 두 언어 사이를 왕복하는 이야기이다. 집은 오래전 나무였고 나무는 오래전 풀이었고 풀은 과거에 흙이었고 흙은 아주 오래전 집이었다. 전시는 ‘집’, ‘역사’, ‘기억’ 같은 말 대신 ‘풀의 자리’, ‘그림자’, ‘물웅덩이’라는 말로 쓰인 기록물이 역사가 될 수 있을지 질문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