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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더 트랜스보더 띵

2022년 8월 11일 – 2022년 8월 28일
13시 – 19시 (월, 화, 수요일 휴관)
사가

작가: 김미례, 장률, 정재은
기획: 이종찬
디자인: 신자유
주관: 사가
후원: 서울특별시, 청년허브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생소한 단어가 어디를 가든 무시로 울려 퍼지던 시절이 있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턱이 낮아져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질 것(global village)이라는 낙관적이고 희망에 찬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의 일면을 가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사태의 핵심을 잘못 파악한 말이었다. 상품과 자원이 초국적(trans-national)으로 넘나드는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사람들이 국가 간 장벽의 존재를 거대하게 절감하곤 하는 일들은 빈번히 일어났다. 세계화는 우리가 상품을 싸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계화는 인간보다는 자본 쪽에 가까운 논리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현재 실시간으로 ‘세계화(globalization)의 종말’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2020년과 2022년은 상징적인 해였다. 먼저 2020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발로 전 세계가 팬데믹 쇼크에 빠져들자 그 즉시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들은 꽁꽁 닫혀버렸다. 불안의 심리를 채운 건 극단적인 혐오의 정동이었다. 그리고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껏 세계화를 가능케 했던 중요한 전제 조건들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저개발 국가들의 값싼 노동력, 그리고 세계 시장을 가능케 한 글로벌 밸류 체인(global value chain)과 같은 시스템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세계화’를 꿈꿔보게 된다. 자본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다시 새롭게 창안해내는 세계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아니라,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월들리제이션(worldlization)으로서의 ‘세계화’. 세계화 아닌 세계화. 대안 세계화. 렛츠 두 더 트랜스보더 띵(Let’s do the trans-border thing).  

경계(border)의 안과 밖 대신 경계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다큐멘터리 영상 세 편을 한 자리에 모았다.

김미례의 ‹노가다›(2005)는 평생을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온 아버지의 떼꾼한 얼굴에서 출발하여 한국의 불평등한 일용직 노동(자) 시스템 문제로, 더 나아가 그 구조를 배태한 일본의 식민지배 과거로까지 거침없이 거슬러 올라간다.

장률의 ‹풍경›(2013)은 한국을 찾은 이주노동자들에게 그들이 꾸었던 꿈(夢)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그들의 노동 현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꿈이란 ‘좌절된 현실의 대리충족’이라 정의한 프로이트의 말이 떠오르지만, 장률의 카메라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정재은의 ‹고양이들의 아파트›(2022)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재건축 사업을 앞두고 사람들이 떠나간 텅 빈 둔촌 주공아파트 대단지에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남겨진 길냥이들, 그리고 그들을 도우려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종(種)과 종 사이의 경계를 초월한, ‘소유’가 아닌 ‘이웃’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어떤 우정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영화관이 아닌 전시장에서 작품을 상영한다는 조건에도 주목해주시길 바란다. 영상의 시작과 끝 시간 정보가 포함된 타임테이블을 따로 고지하지 않기로 한 것도 기획자의 ‘불친절’이라기보다 전시장에서의 관객성(spectatorship) 문제를 염두에 둔 나름의 선택이었다. 상영 작품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물론 이 관객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고려되었음을 고백해둔다.